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귀주성 전투 (문단 편집) === 나는 이 자리를 떠날 수가 없다. === || [[파일:attachment/guijusung5.jpg|width=450]] || || 현재 [[귀주성]] 전경. 북한의 국보 제60호 || 10월 20일 밤, 북로군은 다시 [[귀주성]]을 포위하고 [[귀주성]]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한다. 북문과 남문 앞에 각각 1개 부대를, 평지인 동문에는 2개 부대를 배치해 동문을 뚫어내겠다는 결의를 보였다. 수십 대의 [[트레뷰셋|발석거]]를 동원해 동문 쪽 성벽을 무너트리고 성문 안에 몽골군이 진입할 뻔했으나 이를 필사적으로 막아내 몽골군 70여 명을 죽이고 겨우 막아냈다. || [[파일:external/www.samgookji.com/014.jpg|height=150]] || || [[발석거]] || 10월 21일 [[귀주성]] 서쪽에 있는 산인 용산(龍山)을 점령한 몽골군은 서문 쪽에 공격을 감행, 성문을 일부 부셨고 그곳에 또다시 몽골군이 진입을 시도했다. 북문을 지키던 병마사 박서가 급하게 이동해 세 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몽골의 진입 시도를 막아냈다. 한편 김경손은 귀주성 최대의 격전지인 남문에서 의자에 앉아 지휘를 하고 있었다. 기록에 따르면 '(적이) 다시 공격해 오자 김경손은 의자에 앉아서 독전하고 있는데 큰 돌덩어리가 김경손의 머리 위를 지나 뒤에 있던 군졸에게 명중해 전신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.(復來攻 慶孫據胡床督戰 有砲過慶孫頂 中在後衙卒 身首糜碎。). 이에 부하들이 어서 자리를 옮기라고 청했으나 김경손은 이렇게 말했다. >'''안 된다. 내가 움직이면 군사들의 마음이 모두 흔들릴 것이다.''' >不可 我動則 士心皆動。 >---- >《[[고려사]]》 김경손 열전 30일 동안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1231년 11월 초순, 몽골는 1차 공방전에서 퇴각하게 된다. 이 공방전 일수가 《고려사》김경손 열전에서는 20여 일, 박서 열전에는 3순(旬), 즉 30일이라고 나와있다. 그리고 고려사에는 몽골 장수의 말을 빌려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. >이렇게 작은 성이 대군을 맞아 싸우는 것을 보니, '''[[명량 해전|하늘이 돕는 것이지 사람의 힘은 아니다.]]''' >此城以小敵大 天所佑 非人力也。 >---- >《[[고려사]]》 김경손 열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